Trace, 1997
 
사진의 마음
성완경, 1997
 

박홍천의 바다 연작은 비범한 색채와 시적 흥취로 감싸여 있다. 그것은 미세한 빛으로 시간의 호흡을 살려낸 아름다운 ‘그림’ 들이다. 마치 페르메르의 델프트 풍경처럼, 시간은 순간의 응결이 아닌 영원의 빛 속에서 조용히 숨쉬고 있다. 이 사진들은 작가가 96년 가을에서 97년 여름까지 약 1년 동안 오스트레일리아의 멜버른과 시드니의 바닷가에서 찍은 것들이다. 찍은 사진이라지만, 사실은 미적 효과가 사전에 충분히 계산되어 롱 셔터로 잡아낸 풍경이라는 점에서 ‘만든’ 사진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듯하다. 사진이 찍는 순간의 선택을 통하여 짧은 셔터 스피드 속에 순간을 응결시키고, 이에 비해 뎃상은 반복된 시선과 움직이는 손의 궤적을 누적시켜가며 시간의 흔적을 뎃상 속에 가두어 놓는 것이라면, 박홍천의 사진은 사진에 보다는 오히려 뎃상이나 회화에 가깝다. 박홍천은 무수한 시간의 필획을 인화지 위에 누적시켜가며, 하나의 마음의 시를 사진 속에 풀어헤쳐 놓는다. 그것은 누에의 몸 위로 지나간 미세한 안개 같은 실이나 새벽의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우리가 문득 발견하는 안개 같은 거미줄의 엉킴, 물레에 감긴 실, 메조틴트의 흔적, 마니에르 느와르의 방법으로 어둠으로부터 쌓아 올린 밝음의 흔적 같은 것들을 연상시킨다. 비어 있음과 충만함 사이의 가운데 길로 그가 걸어가며 이루어내는 것은 그림의 마음이고, 마음의 사진이다. 그의 사진의 비범한 색채와 시적 흥취는 바로 이 마음에서 연유하는 것이고, 보이는 것 너머를, 그 안쪽을 들여다보는 놀라운 화가의 눈에 의한 것이다.


사진이 ‘보이는 것의 무수한 전리품들을 노획하는 육지의 예술이냐, 아니면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수면 밑에 감추어져 있는 에너지를 드러내는 바다의 예술이냐’ 라는 재미 있는 비유의 구분법이 있는데, 박홍천은 단지 그것이 바다를 소재로 했다는 우연의 일치 때문이 아니라 더 깊은 의미에서, 바다의 예술로서의 사진가이다. 박홍천은 바다 쪽으로 카메라를 세움으로써 사진의 마음을 담아냈을 뿐 아니라 빼어난 색채와 우아함으로 물질과 시간을 한데 녹여내는 데 성공했다. 모든 위대한 문학의 전통 속에서, 특히 호머의 서사시에서 바다가 기억과 시간의 상징이고, 또 여성성으로 비유되듯이 박홍천은 바다와 하늘과 그리고 가끔 한구석에 함께 등장하는 비어 있는 벤치나 산책길로 구성된 이 작품들을 통해, 지금은 여기에 없는 그러면서도 그 체취가 항상 작가의 곁에서 떠도는, ‘어머니’ 에 대한 그리움 비슷한 어떤 근원자에 대한 갈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는 디즈니랜드나 자연공원풍의 인공적인 위락시설을 소재로 하여 그것에 깃들어 있는 당대 문화의 불길한 그림자를 놀라운 설득력으로 형상화한 ‘앨리스에게’ 연작들을 제2회 광주 비엔날레에 출품하여 현재 전시 중에 있다. ‘앨리스에게’ 연작들이 ‘가짜’의 미학으로, 초과의 스펙타클로, 과밀의 공간구조로 오늘의 문화 민주주의의 불길한 색채를 읽게 해준다면, 오스트레일리아의 바다로 렌즈를 들이댄 이 작품들은 근원의 미학, 마음의 눈, 그 수평과 비어 있음의 넓이를 통하여 그의 예술의 근원이 현상 너머의 마음을 읽어내는 비범한 눈에 있음을 다시 한번 환기시켜 준다.

 

- 박홍천, 서울: 샘터 아트북, 1997

미술평론가이자 전시기획자인 성완경은 광주 비엔날레의 국제전 커미셔너 (1995년, 1997년) 및 예술감독 (2002년)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인하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임하고 있다.